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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살아서 두 번의 전쟁을 겪으셨다.
그리고 국가유공자가 되어 지금 '국립이천호국원'에 계신다.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던 아버지.
간혹 옛날이야기하듯 전쟁 이야기를 하셨는데 늘 그렇듯
'너희들은 아무리 얘기해도 겪어보지 않아서 모른다.'로 끝맺으셨다.
속초에서 낙하산 훈련을 받은 1호라고 늘 자랑스러워했던 아버지.
6.25 때 엄마를 잃고 동생과 형제들을 챙겨야 했던 아버지.
아버지는 가끔 일본어, 중국어, 베트남어, 영어까지 생존 언어를 하셨다.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들 나라와 인생의 대부분이 엮여있기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엄마를 슬프게 했다.
두 분 모두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해하셨지만
참혹했던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살아야 했던 그 나이 또래의 인생이 대부분 그러하듯
선택의 여지없이 두려움을 안고 또 전쟁에 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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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사진은 아버지가 부산에서 베트남으로 떠날 때 사진이라고 한다.
태극기를 들고 있는 아버지와 수심에 찬 엄마.
어린 삼 남매를 두고 전쟁터로 향하는 남편과 젊은 아내의 마음을 나는 감히 알지 못한다.
그 현실이 너무 슬퍼 보일 뿐.
아무튼 아버지는 살아 돌아오셨고 다행히 다친 곳도 없으셨다.
다행이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죽음이, 부상의 참상이 우리네 가족들을 슬프게 했던가!
우리 집엔 아버지와 엄마가 베트남 참전기간에 서로 보낸 편지가 한 상자 있다.
언젠가 엄마가 버리겠다는 걸 겨우 말렸는데.
심심하던 어느 날 내가 몰래 읽어봤다가 괜히 쑥스러워 그만뒀다.
나는 어릴 때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시를
아버지의 책장에서 읽었다.
아버지의 군번이 적힌 목걸이와
군용 담요, 군복과 군인 모자 등도 어릴 적 기억 속에 남아있다.
한세월이 지나
국가유공자가 되던 해, 아버지의 한은 조금 어루만져진 듯싶다.
돌아가실 때까지 호국원에 묻히게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셨으니 말이다.
이천 호국원엔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수많은 또래의 아버지가 함께 계신다.
돌아가시는 분이 많아 자리가 부족한지 계속 산을 깎아 자리를 만들고 있다.
이천호국원은,
언덕 경사가 심해 셔틀버스도 운영하고,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구내식당도 운영하는데 맛도 괜찮다.
엄마는 이제 허리가 아파 못 오겠다고 안타까워하시지만,
아버지 계신 곳은 해도 잘 들고 공기도 맑아 아버지가 좋아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꾸 눈물이 나서 그만 써야겠다.
이 땅을 지키고 일구기 위해 애쓰다 돌아가신 이름 모르는 수많은 아버지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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