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 대성당
'배론'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이곳의 지형이 배 밑바닥 모양과 비슷하여 일컫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1791년 정조 15년에 일어난 신해박해 이래 천주교 신자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이곳에 는 황사영백서가 집필 된 토굴이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신학교가 있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생으로 두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의 분묘가 있다. |
첫 교구 신학교-배론 신학교
배론 신학교-충북기념물 제118호 1855년 조선교구의 장상이던 메스트르신부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장주기 요셉의 집에 우리나라 첫 교구신학교를 설립했다. 1856년 교장으로 부임한 푸르티에 신부와 1861년에 부임한 프티니콜라신부는 김 사도요한, 유 안드레아, 권 요한, 임 빈첸시오, 박 필립보, 이단돌, 이 토마스 등 신학생에게 라틴어, 수사학, 철학, 신학 등 서양학문을 가르쳤다. 신학교는 박해와 건강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교구장 베르뇌주교의 지원과 선교사들의 애정, 신자들의 기도에 힘입어 사제양성소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 했다. 그 결과 1866년 라틴어과정 4명, 신학과정 2명, 삭발레자 1명, 소품자 1명 등 8명의 신학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나면서 두명의 신부와 장주기, 3명의 신부가 순교하였고 신학교는 문을 닫았다. 옛 신학교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고 현 건물은 2003년 충청북도의 지원으로 복원되었다. |
황사영 백서가 쓰여진 토굴 황사영 알렉시오는 1801년 2월 말 신유박해를 피해 배론에 살던 신자 김귀동의 집으로 왔다. 옹기저장고로 위장한 토굴에서 8개월간 은신하면서 9월22일 백서를 완성했다. 백서는 모두 122행 13,384자의 글자를 비단에 썼으며 북경교구장 구베아주교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되었다. 백서의 내용은 인사말과 신유박해의 발단과 과정, 주문모신부와 총회장 최창현을 비롯한 순교자들의 열전,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위한 5가지 방안, 관면요청과 맺음말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황사영은 9월29일 의금부에 체포되었고 백서도 압수되었으며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황사영은 같은 해 11월5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백서는 1925년 79위 시복식 때 교황 비오 11세께 증정되었고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토굴은 1987년 서울대 이원준 교수의 고증으로 복원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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