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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여행(해외)/중국

상해여행 - 4. 샤오싱(绍兴), 루쉰고리와 서성고리

by 푸른연꽃은 2026. 4. 26.

 

2026년 4월 20일. 흐리고 더움 26도

 

기대했던 루쉰고리(루쉰)와 서성고리(왕희지)를 가는 날이다. 여기서 루쉰과 왕희지를 잠깐 소개하자

 

중국의 작가, 사회운동가, 사상가.

본명저우수런( 周树人)출생1881년 9월 25일, 청나라 절강성 영소대도 소흥부 회계현 동창방(現 중국 저장성 사오싱시 웨청구 노신중로)사망1936년 10월 19일(향년 55세), 중화민국 상하이(現 중국 상하이시)국적청나라 → 중화민국직업작가, 평론가, 정치인
 

근현대 중국 문학의 아버지이자,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평가받는다. 중국 근대화의 선구자 천두슈는 서구의 민주주의와 과학주의의 도입을 근대화의 첫걸음으로 여겼다. 이에 호응하여 나온 것이 후스의 문학 혁명이다. 그의 문학혁명은 백화문의 보급이다. 그는 모든 국민이 자신의 사상을 글로 표현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근대화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근대화의 필수 조건인 문학혁명을 실천하고 성공으로 이끈 것이 바로 루쉰이다. 그의 소설은 중국이 봉건주의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통하던 과도기에 중국인들이 체험하였던 고통과 혼란과 방황을 주제로 하고 있다. 2000여 년간 쌓이고 쌓여 왔던 봉건주의 전통 사회의 거대한 탑이 붕괴되는 현상은 중국인들로서는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루쉰은 봉건주의라는 전통 사회의 미망에 빠져 있는 국민들을 문학 작품을 통해 계몽하여 봉건 윤리라는 미신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앞장서서 중국의 근대화에 공헌했다. (#)


루쉰은 중국에선 마오쩌둥에 의해 신격화된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루쉰 전집은 살아남았다. 중요한 것은 루쉰의 의도와 상관없이 루쉰의 이미지가 넘사벽의 위인으로 화석화됐다는 거다. 마오쩌둥은 루쉰 정신으로 식민 시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해서 루쉰은 공산주의자 이미지가 돼버렸다. 루쉰이 세상을 떠난 지 사흘 뒤 공산당중앙은 루쉰을 "공산주의 소비에트운동의 친애하는 전우"로 일컫고, 서거 1년을 기념하는 강연에서 마오쩌둥은 루쉰을 "공산당의 조직원은 아니지만 그의 사상, 행동, 저작은 모두 마르크스주의화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1940년 1월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에서 루쉰을 "위대한 문학가이자 사상가, 혁명가"로 자리매김한다. 이건 루쉰을 문화적 아이콘으로써 선취한 것이다. 다시 말해 루쉰의 정신적, 문화적 가치를 중국공산당의 혁명적 자원으로 독차지한 셈이었다. 이렇게 중국공산당에 의해서 사상가임을 중심으로 부각된 루쉰 때문에, 문인으로서 그는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때문에 198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에서 문인으로 루쉰을 더 자세히 보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먼저 루쉰이 있는 그 자리로 돌아가자는 기치 아래, 소설의 창작에 큰 영향을 주는 그의 내적 모순과 다양한 갈등을 분석하기 위한 작업도 중시하기 시작했다. 한국에도 1920~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루쉰 작품이 전해진다. 1948년 이후 한국에선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로 중국과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은 금기시됐고, 레드 콤플렉스로 인해 루쉰에 대한 편견도 오랫동안 유지되기도 했다. 한국에서 받아들인 루쉰의 모습은 시기에 따라 달라졌다. 1920년대는 무정부주의자, 1930년대는 좌파 작가, 1960~1970년대 오면 실천적 지식인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평자들은 읽는 사람의 환경과 사고의 스펙트럼에 따라 루쉰을 굉장히 다양하게 읽게 된다고 평한다.[10]

루쉰의 작품은 중국 밖에서도 주목을 받는다. 그의 작품은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권에서도 널리 애독되고있다. 일본에서도 중학교의 모든 국어 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수록되어있다.# 서양권에서도 유명하며 가장 인지도 높은 근현대 중화권 소설가다. 그의 소설 《광인일기(루쉰)》는 노벨연구소 선정 세계 100대 문학에 포함됐다.[11] 1986년, 문학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모든 제3세계 문학이 취하는 국가적 우화 형식의 최고의 예로 《광인일기》를 인용했다. 문해 비평가 글로리아 데이비스는 루쉰을 프리드리히 니체와 비교하면서 두 사람 모두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현대 건축에 갇혀 있었다"고 말한다. 비평가 레오나르도 비토리오 아레나의 말에 따르면, 루쉰은 니체의 스타일과 컨텐츠가 과도하기 때문에 니체의 매력과 거부감이 뒤섞인 니체에 대한 모호한 관점을 선택했다고 평했다.

한편 루쉰은 러시아의 문호인 톨스토이와 비교되는데, 루쉰이 중국 민중들의 이기심과 탐욕과 무지함과 천박함을 그대로 묘사했다면 톨스토이는 정반대로 기독교 이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민중들을 현실보다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왕희지(출처 daum 백과)

 

자는 일소(逸少). 낭야(瑯邪) 린이[臨沂 :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 린이 현(臨沂縣)] 사람이다. 아버지 왕광(王曠)은 동진 건국에 공을 세운 왕도(王導)의 사촌동생이다.

왕희지는 비서랑(秘書郞 : 궁중의 전적을 관장하던 관직)을 시작으로 회계왕우(會稽王友)·임천대수(臨川大守)·강주자사(江州刺史)·호군장군(護軍將軍) 등을 역임했다.

 

명문 출신이었으나 중앙정부의 관직을 구하지 않아, 351년(永和 7)에는 우군장군(右軍將軍)·회계내사(會稽內史)에 임명되어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으로 부임했다. 이 관직 이름에 의해 왕우군(王右軍)으로도 불린다.

 

그는 한대에 싹이 튼 해(楷)·행(行)·초(草)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까지 승화시켰다. 수대(隋代)를 거쳐 당대에 이르러서는 서예에 뛰어났던 황제 태종이 왕희지를 존중하여 그의 글씨를 널리 수집했기 때문에 왕희지의 서법이 크게 성행했다. 왕희지의 몇몇 필체와 서명은 그의 생존 당시에조차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며, 시대가 지나면서 중국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품격 높은 예술인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그의 진적(眞跡)은 전해지지 않으나 〈난정서 蘭亭序〉·〈십칠첩 十七帖〉·〈집왕성교서 集王聖敎序〉 등의 탁본이 전하며, 이중 가장 이름 높은 서첩은 〈난정서〉로, 여기에는 353년 계제사(禊祭祀 : 3월 삼짇날, 물가에 가서 흐르는 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제사)가 열리는 기간에 42명의 문사들이 모여 시를 짓고 술을 즐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행서로 씌어진 왕희지의 비문은 독특한 서체인 행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위의 〈난정서〉는 후대 특히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명대(1368~1644)에 그림의 주제로 많이 채택되었다. 그의 후손 가운데 가장 이름을 떨친 서예가는 그의 막내아들인 왕헌지(王獻之)이다.

 

 

아침 7시50분 샤오싱베이(绍兴北) 역 기차를 타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어제 곯아떨어져서 잤는데 새벽 3시쯤 깼다. 오늘은 샤오싱(绍兴) 가는 날이다. 숙소에서 홍차오역(红桥站)까지 택시로 가려했지만 안전한 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전철을 타기로 했다. 6시 45분, 숙소를 떠나 18호선 전철을 타고  롱양짠(龙阳站)에서 2호선 홍차오 기차역에서 내렸다. 기차는 정시에 떠나 9시쯤 샤오싱에 도착, 디디택시로 (34.70위엔) 루쉰고리(鲁迅故里)에 도착했다. 날씨는 덥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이곳에서 숙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에게 밀려 다니다가 더위와 햇빛을 피하려고 식당에 들어갔다. 무작정 들어간 집은 관광지라 그런지 엉터리음식이다. 나는 훈둔, 연숙은 볶음 국수(33위엔)를 시켰는데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둘 다 반쯤만 먹었다. 더위를 피해 수로 옆 나무그늘에 앉아 중드(중국드라마)에 나오는 배우처럼 분장한 중국 mz 들의 사진 찍는 모습을 구경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어찌나 진지하게 사진을 찍던지...

 

 

 

날이 너무 덥고 지쳐 루쉰고리(鲁迅故里)에서 서성고리(书盛故里)로 갈 때는 디디로 이동했다.(8.91위엔). 서성고리(书盛故里)의 왕희지박물관은 진품은 없고 모조품만 진열되어 있어 실망했다. 표를 살 때 불친절한 직원 때문에 기분도 나쁘고. 암튼 대충 쉬며 사진으로 남기고 동네 구경.

 

 

 

남은 시간은 근처 공원에서 쉬었다. 수로 옆이라 바람도 불고 한가해서 잠깐 졸기까지... 돌아가는 기차시간에 맞춰 디디로 샤오싱(绍兴)에 가서 기차를 타고 홍차오역(红桥站)에 내리니 해가 저물었다.

 

기차역에서 나오자 날씨가 갑자기 싸늘해지고 바람이 분다. 밤 9시가 다 되어 주포(周浦)에 도착. 어제 간 백화점 지하 식품코너에서 저녁을 먹었다. 주로 채소를 시켰더니 살 것 같다. 맛있다. 돌아갈 땐 어제 먹은 과일이 생각나 수박과 하미과를 샀다. 숙소에 돌아와 씻지도 못하고 누웠다가 잠이 들었다.

 

정말 고단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