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등산

 

1. 날씨 : 비 조금, 흐림

2. 등산 경로 : 천황탐방지원센터-바람폭포-통천문-천황봉-구름다리-천황탐방지원센터

3. 거리 : 왕복 5km

 

* 월악산 등산

높이 : 1097m

코스 : 덕주사 - 마애불 - 송계 삼거리 - 영봉 (원점회귀)

거리 : 약 5km (왕복 10km)

소요시간 : 9시30분 출발, 왕복 8시간 **등산 매우 못함.

주차 : 덕주사

주소 :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 1-1

 

 

2022, 5,3, 날씨 맑음

 

악(岳큰 산 악) 자 들어가는 산이 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월악산을 가려고 나섰다.

새벽에 꾼 꿈이 잠시 발길을 잡았지만,

한라산도 지리산도 다녀왔고

치악산, 삼악산도 다녀온 후라 조금 여유도 생겼다.

 

하지만 요즘 몸이 안좋아져서 더더욱 산을 올라야겠다고 생각했고

오랜만의 산행이라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더구나 어제 아파서 누워있다가 갑자기 정한 일정이라

배낭엔 토마토 한개, 굴러다니는 사탕 몇 개만 준비하고 길을 나섰다.

 

7시에 출발해서 2시간이 넘은 후에야 덕주사 주차장에 도착해서 등산화로 갈아 신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초입은 마치 비단길처럼 초록도 싱그럽고,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도 없이 고요해서

너무 좋았다.

 

 

하지만, 마애불을 지나자마자 보이는 저 계단들. 

 

 

그래도 중간중간 월악산이 보여주는 멋진 경치를 보며

호흡을 가다듬고 열심히 올라갔다.

 

 

송계 삼거리까지 어찌어찌 왔는데 엄청난 위용의 영봉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났다.

마의 구간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틀 동안 죽만 먹어서 체력도 부족하고

오늘도 물만 먹고 여기까지 왔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다시 출발했다.

 

 

그러다가,

앗, 저기 영봉이 보인다.

 

 

그리고 마의 구간에 있는 계단을 오르고 올라 마침내

월악산의 최고봉, 영봉을 만났다.

 

 

**월악산

 

충북 제천과 충주에 걸쳐 있는 월악산은 삼국시대에 영봉 위로 달이 떠 오르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월형산'이라 불렸고 고려 초기에는 '와락산'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도읍을 정할 때 개성의 송악산과 중원의 월형산이 경쟁하다가 개성이 도읍으로 확정되자 도읍의 꿈이 와락 무너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월악산의 주봉인 영봉은 험준하고 가파르며 높이 150m, 둘레 4km나 되는 거대한 암반이 형성되어 있으며 신령스러운 봉우리라 하여 영봉(寧峰), 또는 나라의 큰 스님이 나온다 하여 국사봉이라 불리었으며 우리나라의 중요한 제사인 '소사'를 지내던 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산중에 정상을 영봉이라 부르는 곳은 백두산과 월악산 둘 뿐이다. 영봉에서 보이는 전경은 충주호와 남산, 계명산 등이 어우러져 웅장하고 수려하다. 맑은 날에는 치악산과 소백산도 조망할 수 있다. -안내문 中-

 

 

 

 

인증숏도 찍고,

360도로 보이는 월악산의 멋짐도 실컷 누리고

이제 내려가기로 했다.

 

송계 삼거리에서  편의점 샌드위치로 점심을 대신했다.

 

그리고,

곳곳에 피어있는 야생화를 보다 보니 힘든 것도 잊을 수 있었다.

 

 

이제 내려갈 일이 걱정,

왼쪽 무릎에 파스를 붙이고 출발했다.

 

정상에서 보았던 부부가 사진을 찍고 있는 곳을 지나 하산하는데

한참 가다 보니

덕주사 표지는 안 보이고 동창교 표지만 보인다.

 

이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중간에 만나나 보다 하고 계속 내려가는데

길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래도 잠깐 의심하고 또 하산,

 

한참 가다가

왜 미륵불 표지와 덕주사는 안 보이고 동창교 표지판만 계속 나오지?

 

그때도 잠깐 의심하고 나선,

곧 나오겠지... 했는데

끝었는 내리막에 몸과 마음이 지쳐갈 즈음,

확실히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엉뚱한 곳으로 하산한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서 동창교 안내판을 보니 덕주사와 다른 방향으로

그때 시간이 3시 30분 경이라 다시 송계 삼거리로 가면 2.5km를 올라가야 한다.

 

언제 거기를 다시 간단말인가.

지금도 지쳤는데...

 

되짚어 올라가다 아까 보았던 부부가 내려오는 걸 보고

동창교로 하산하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내가 잘못 내려왔다고 하니

그러지 않아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단다.

아까 덕주사 쪽에서 왔는데 왜 동창교로 가지? 하고 말이다.

 

난 부부가 내 뒤를 계속 따라오기에 오히려 의심을 않고 내려왔었는데...

 

동창교에서 덕주사까지 시내버스가 있다는 부부의 말을 믿고

나는 할 수 없이 일단 내려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올라갈 수는 없었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이상한 것은 그 부부는 내 뒤에 오지 않았다는 거.

동창교로 하산한다더니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넘 이상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계속 따라다녔다.

 

하산길 끝에 산신각이 보여 얼른 사진 찍고 나와서 기록을 읽어 보니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곳이라

글로 남겨 본다.

 

월악산 산신각

 

월악산 산신제의 유래

월악산 산신제는 고려(고종 14년, 1227년) 시대에 '국행제'로 지냈을 만큼 국민의 안녕과 국가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 원나라 동정원수가 대군을 이끌고 고려조를 침략하여 압록강을 건너와 충주성을 공격할 때 우리 지역에 폭풍우를 몰고 와 비바람과 천둥번개를 일으켜 원나라 군대가 정신을 못 차려 더 이상 충주성을 공격하지 못하게 했던 중요한 역할을 한 충신의 산신제였음.

그런 유래는 계속 전승되어 조선시대에는 매년 정월과 시월에 관행제로 월악 산신제를 지내왔으나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우리 민족정기 말살정책으로 관행제를 못하게 함으로써 송계 주민들이 대동제를 지내오고 있음.

원래 월악산 신당이 상, 중, 하 3당으로 되어 있고 당 안에는 갖가지 짐승 모형의 조각품이 있었으나 1978년 무속신앙을 철폐함에 따라 산신당이 철거되었고 당안에 있던 짐승 모형의 조각품도 일실하였는데 1983년 송계리 주민들이 산신당 상당을 재건하여 지내왔으나 건물의 노후로 인하여 철거하고, 2000년도에 현재의 산신당 하당 위치에 새롭게 신축하여 매년 정월과 시월에 한수민 주민의 평안을 위하여 산신제를 지내고 있음. -안내문 中에서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새끼 금줄이 쳐져 있다.

 

 

암튼,

정신 차리고 내려오다 보니 사람 소리가 들린다.

 

국립공원관리공단 표시가 있는 옷을 입고 있기에 너무 반가워

내가 '잘못 내려왔다'고 하니

내려가서 버스를 타라고 한다.

 

덕주사까지 얼마나 걸리냐니까 버스로 10분,

버스시간은 모른단다, 아마도 한시간에 한대?

 

도보로 몇분이냐니까 30분.

 

옆에 있던 분이 정색을 하고 조용히 참견하시는데

1시간 넘는다고 하신다.

 

하지만 처음 말을 붙인 아저씨는

30분이면 간다고  가보라고 한다.

 

지금이 4시 반이니 퇴근시간 즈음이고 해서 차를 좀 태워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도보가 가능하다니 그냥 걷기로 했다.

 

사실, 현금도 없고, 교통카드도 없는 상황이라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걷다 보니 펜션들이 보이는데 사람이 없다.

전봇대 기둥에 마침 콜택시 전번이 있기에 찍어서 만일을 대비했다.

 

 

다행히 해도 길어져서 아직 훤하고,

날씨도 좋고.

 

갑자기 중국 오지여행이 생각났다.

아는 사람도 없고 하루에 버스 한 대 다니는 그 험한 오지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여기에서야 뭐 껌이지. ㅎㅎ 스스로를 위로하며 걷다 보니

도로가 나온다.

 

이 길은 아침에 덕주사 갈 때 가던 길이네...?

마침 차 두 대가 연거푸 지나간다.

잘하면 차를 얻어 타고 덕주사 갈 수 도 있겠다 싶어 마음이 놓인다.

 

조금 걷다가 차 소리가 나길래 돌아보니

아까 보았던 국립공원 아저씨와 트럭이다.

 

무조건 손을 흔드니 아저씨가 웃으며 타라고 하신다.

내가 걱정돼서 오신 거 같다.(착각일까?)

아까 본인이 시내버스 얘기한 것도 마음에 걸리고,

암튼 덕주사까지 차로 10분이니, 걸어서 갔으면 족히 1시간 걸렸을 것 같다.

 

덕주사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난 현금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서 너무 미안했다.

뭐라도 드리고 싶었는데 오늘따라 준비한게 하나도 없다....

 

아저씨는 나의 미안함에 괜찮다고 웃으시며 부리나케 가버리신다.

 

아쉽지만 이 한 장의 사진을 남겨 아저씨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아울러 산속에서, 도로에서, 묘족 마을에서 기꺼이 나를 태워주던

착한 중국인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이제 한숨 돌리니 다리가 풀리고 후들거리며 피곤이 몰려온다.

하지만 덕주사 경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해피엔딩으로 끝난 나의 월악산 등산에 부처님의 가호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서.

 

월악산 중턱 마애불엔 덕주공주가 오빠인 마의태자와 함께 망국의 한을 달래며 덕주사를 짓고 아버지 경순왕을 그리워했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자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 일행은 신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병사를 양성하고자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문경군 마성면(하늘재)에 이르러 마의태자의 꿈속에서 관세음보살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큰 터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 불사를 하고 석불을 세우고 북두칠성이 보이는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조성하여 만백성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일ㅈ지 말라'라고 하였다.

 

일행은 그 장소를 찾아 석불 입상을 세우고 북두칠성의 별빛이 한껏 비추는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각하며 8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니 그곳이 바로 덕주사 마애불이다.

 

 

* 대불정주 비각과 대불정주범자비

 

 

* '대불정주범자비' ( 충북 유형문화재 제231호)

 

대불정주범자비는 인도의 옛 문자인 범자가 새겨진 비석이다. 1988년 송계계곡 정비 중에 발견하여 월악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 안치하였다가 현재의 위치에 옮겨 놓았다.

비석에는 고통받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내용의 능엄주*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전체 11행으로 첫 줄에는 '대불정주'라는 한자를 안으로 들어가게 새겼고 다음 줄부터 150자 전체가 범자로 기록되어 있다.

다라니**를 새긴 사례는 '조선 금석 총람'에 4개가 소개되고 있는데 모두 휴전선 북방에 있으며 남한에는 송계리 '대불정주범자비'가 유일한 것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 산신각

 

 

덕주사는 하늘과 땅의 서기를 서로 잇는다는 월악산 영봉의 중턱에 자리한 신라 고찰이다. 

우리 민족은 산이 신성한 곳으로써 우주의 생명력이 모여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키는 곳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산의 신령함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산신 숭배에 대한 기록은 중국 후한서 동이전에 "그들의 풍속은 산천을 존중하며 법에게 제사를 드리며 그서를 신으로 섬긴다"라 하였고 제왕운기와 본기, 삼국유사 등에 "환웅은 하늘에서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세웠으며 그의 아들 단군왕검은 아사달에서 산신이 되었다"라고 전해지고 있다. 산신 숭배는 단군신화부터 시작하여 민중종교로 도착된 뿌리 깊은 민간신앙이다.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되어 대승적 차원으로 산신신앙을 하나의 정신으로 불교에 수용하여 체계적인 산신신앙이 되었음은 전국의 모든 사찰에 봉안된 산신과 산신 의례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사찰 내에 산신신앙이 수용되었을 때에는 산신도가 형성되지 못하고 문자화 된 위패나 신패를 모시는 산령각만이 있었다. 산신도를 봉안하기 시작한 시기는 단기 4130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산신을 마을의 안녕과 생명을 보호하며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신으로 숭배하다가 사찰 내에 호법 선신과 일반 대중들의 외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덕주사 산신각은 단기 4326년 영봉의 맥을 따라 자연스레 신품으로 조화를 이룬 터에 성일 화상이 가로 180cm, 세로 210cm의 화강암에 산신도를 양각으로 봉안하니 월악산 산신이 이곳의 외호신으로 안주해 참배자의 염원을 섭수하게 되었다.

이후 보림 화상이 산신각 중창불사를 하여 월악산 덕주사 산신각은 국내 최고의 영험 도량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안내문 中에서-

 

 

 

 

덕주사도 돌아보고 이제 끝으로 물통을 가져다가 덕주사 경내에 있는 물을 담았다.

지친 마음도 씻길 만큼 부드럽고 달콤한 물맛이다.

왠지 아픈 병도 나을 것 같은 느낌!

 

 

수조 옆엔 공조팝나무 꽃이 절정이고,

 

 

오늘 파란만장했던 등산도 해피엔딩이니

그저 감사할뿐이다.

 

 

 

등산 일시 : 2022.4.5

날씨 : 맑음, 바람 6~9 매우 강함

등산코스 : 유일사 주차장~ 천제단~ 원점 회귀

소요시간, 거리 : 4시간(왕복), 편도 4km

등산시간 : 오전 9시 출발

주차 : 유일사주차장(무료)

유의점 : 바람이 강함. 정상에서 머물기 어려움

유일사

 

지난번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고 나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태백산 등산을 준비했다.

 

태백산은 철쭉 필 때와 겨울에 한 번 다녀온 적이 있다.

철쭉이 필 때도 아름다웠고 겨울 차가운 산 능선도 보기 좋았다.

하지만 바람이 무척 불어 정신이 없었던 기억이 있어

예전 사진을 찾아보았다.

2008년 12월 27일  등산하고 남긴 사진이다.

 

바람과 눈에 치여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한창 사진을 배우던 때라

무거운 카메라는 포기하지 않고 가져가서

이렇게나 멋진 겨울산을 찍었었다.

 

이번엔 아직 겨울이 가시지 않은 계절이라 길은 질척하고 나무들은 이제 눈을 조금씩 부풀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메마른 산을 오르며 생각해 보니

예전에 나는 가장 아름다울 때 산을 가려고 했다.

꽃을 보려고 신록을 보려고, 눈꽃을 보려고, 일출 또는 일몰을 보려고.

그런데 이번엔 아무런 이유 없이 등산을 준비했다.

뭘 보려는 등산이 아니라 산을 오르는 그 자체에 집중하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꽃이 없어도 나뭇잎이 떨어졌어도 산은 산이고,

역시나 무엇 때문에 덜하고 더하지 않은 채 웅장했다.

나는 몰아치는 광풍에 여지없이 흔들렸고, 추위에 귀가 얼얼했으며

등짐은 귀찮고 버거웠다.

 

바람 때문에 정신이 없고 혼이 나간 듯하여

저 멀리 능선을 보는 여유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중간중간 주목의 거대한 자태 감상도 나중으로 미루고

오직 오르기만 했다.

 

정상에선 바람 때문에 사진도 겨우 찍고

바로 내려왔다.

오면서 찬찬히 보자니 죽은 주목 군락과 푸름을 하늘로 뻗은 주목이 보였다.

겨울산이다.

풀은 없고 든든한 나무들만 보인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맞다.

하산길에 보니 바람꽃이 듬성듬성 아주 작게 피어 있었다.

모진 바람에도 불구하고 작은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피어 있었다.

사진에 담기도 힘들 만큼 작은 꽃.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아름답다.

내 마음속에 비교와 나눔이 있었을 뿐.

 

산을 내려오며 생각했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산은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이구나 했다.

 

경로: 중산리 탐방안내소 - 두류동 시내버스(법계사 버스)-로터리대피소-천왕봉

거리: 4,4km(편도)

준비물: 아이젠 및 간식

 

벼르던 지리산 천왕봉(1915m)을 다녀왔다.

지리산을 가는 코스는 여러 가지이지만 나는,

최단코스인 순두류코스로 정했다.

 

순두류 코스의 첫 출발지인 중산리 탐방안내소에 주차하고(주차비 평일 4천 원, 주말 5천 원-카드),

법계사 가는 버스를 탔다.(10분 소요, 편도 현금 2천 원, 사진의 버스시간표 참조)

미리 날씨예보를 확인했고, 며칠 전 비가 와서 아이젠도 준비했다.

 

버스는 10분 뒤에 정류장에 도착했고.

버스에 탄 사람들은 모두 등산하는 사람들이라 자연스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었다.

엄청나게 등산을 못하는 나는 '오늘도 갈 수 있을 만큼만 가자, 욕심부리지 말자'를 목표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초입은 좀 편한 길이 있었지만,

로터리 휴게소(법계사 주변)부터는 너무나 힘들었다.

계속 오르막이 나오고, 돌계단과 밧줄 타기 등등.

 

마지막 0.8km는 더욱 힘든 구간이었다.

 

하지만,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며 드디어 천왕봉에 올랐다. 인간승리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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