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 : 백담사 버스 주차장(버스비 편도 2500원, 주차비 1일 8000원)
거리 : 편도 6km
경로 : 백담사-영시암-오세암(원점회귀)
일찍 길을 나섰다.
무르익어가는 가을을 놓칠까 마음이 성급해져서다.
아직은 어두운 길을 달려 백담사에 도착하니
이제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있는
아스라한 풍경!
그래, 바로 이런 풍경이
나를 새벽에 이곳으로 이끌었던 거야.
물안개가 햇살에 부딪치니
또 다른 아침 풍경이 그려진다.
흐르는 강물처럼,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서
가끔은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조급함에
오늘 또 나는 길을 나섰다.
가을이 가기 전에,
오늘이 가기 전에,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삶이
다하기 전에,
조금은 덜 후회하도록.
아름답고
찬란해서 고마운 햇볕을
눈에 가득 담아가야지...
오래전 정채봉의 '오세암'을 읽었다.
정채봉의 글은 따뜻해서 아름답다는 기억.
오세암으로 행선지를 정한 것은
정채봉 때문이기도 하고
그동안 백담사 계곡을 몇 번 오가면서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계속 미뤄왔던 아쉬움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은 오세암보다
오세암 가는 길이 더 좋았다.
단풍철이 조금 지난 산길은
호젓했다.
화려한 단풍도 좋지만
낙엽이 두텁게 덥힌 산길을 가는 것도
나는 매우 좋아한다.
나뭇잎이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모습,
맑은 물이 종알대는 소리,
하루 종일 바쁜 다람쥐와
내 무게를 견디며 바스락 대는 낙엽들.
숲길에서 난 오감을 열고
한껏
집중한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소중하고 귀해서
자꾸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본다.
읽다가 자주 생각에 빠지게 하는 책도 좋아하지만,
걷다가 자주 걸음을 멈추게 하는
숲길도,
참,
멋지다.
멈추고
또 멈추기를
열몇 번.
오세암이다.
미리 간식을 준비했지만
뜻밖에 오세암에선 무료 점심과 커피가 준비되어 있었다.
된장 미역국과 무짠지와 김치.
미역국은 내가 마지막인 듯 바닥이 보였고
김치는 넉넉했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조금씩 덜어서 맛보았다.
월정사 점심공양도 매우 좋아했는데
이곳 된장국은 심심해서 맛있었고
김치는 말할 것도 없다.
국하나 반찬 두 개.
소박한 점심이 주는 가벼움과 따듯함이 전해져서
오세암이 더욱 좋아진다.
셀프 설거지를 마치고 햇볕 좋은 절마당에서 쉬려는데
갑자기 암자가 부산해진다.
영문을 몰라 서 있으려니
스님이 나타나 얼른 법당으로 가란다.
왜요?
헬기가 뜬단다.
네?
왜 헬기가 뜨는데 이 난리람?
헬기가 좁은 오세암에 내리면
바람 때문에 전부 날아간다는 거다.
아~ 그렇구나.
근데, 사람도 날아가나요...?
하고 싶었지만, ㅋㅋㅋㅋ
그럼 법당 뒤에 있을까요?
스님이 손을 저으며
법당 안에 가 있으란다.
네....?
법당은 쇠고리로 잠겨 있었는데
스님은 급히 문을 열어주더니 신발도 날아가니 들여놓으라고 하고
밖에서 문을 잠그겠다고 하신다.
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생긴 일이라
얼떨결에 법당으로 내몰리는 내 뒤통수에 대고
스님이 하시는 말씀.
'이따 열어줄 테니 기도하고 있으면 되겠네'.
네?
졸지에 기도해야 하는 불교신자가 된
나는
천천히 법당을 둘러보았다.
한참을 즐거운 마음으로 법당을 독차지하고 있다 보니
문뜩 든 생각.
부처님이 설마 나를?
!!!!!!!!!!
잠시 후,
엄청난 굉음이 산을 울리고
헬리콥터 날개바람에 법당 문이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밖이 너무 궁금해서 찢어진 창호지 틈으로 내다보니
낙엽이 온 하늘을 향해 휘날리고, 어디선가 날아온 비닐봉지는
정처 없이 하늘을 헤매다가
가장 큰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걸려버렸다.
그러더니 이내 조용.
조금 후,
잊지 않고 법당 문을 열어줘서 밖으로 나온 나는
헬기가 왜 왔을까 궁금했는데
동자전 가다가
마당에 기름통이 내려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 오세암의 겨울준비를 위해 헬기가 동원됐구나...
오세암에 얽힌 이야기는 익히 아는 내용이라 생략한다.
오히려 이곳에서 더 반가웠던 것은
만해 한용운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들이다.
아쉬운 마음에
숲에 적혀있던 한용운의 시를 소개해 본다.
제목 : 서울에서 오세암으로 와서 박한영에게(自京歸五歲庵贈朴漢永)
지은이: 한용운 번역: 이원섭
一天明月君何在 한 하늘 한 달이건만 그대 어디 계신지?
滿地丹楓我獨來 단풍에 묻힌 산속 나 홀로 돌아왔네
明月丹楓雖相忘 밝은 달과 단풍을 잊기는 해도
唯有我心共徘徊 마음만은 그대 따라 헤매는구나!
오세암 여행에 함께 한
새벽과
단풍 쌓인 숲길과
오세암의 이야기와
한용운의 글을 읽으며
오늘 산행기는 여기서
끝.
후기 : 오세동자처럼 법당에 잠시 갇혔던 나는 잠깐이나마 부처님의 가피로
'견성 득도'할 수 있길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