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향(文鄕) · 예향(禮鄕)으로 불리는 강릉◆
한 고을의 이름 앞에는 그 고을의 전통 이미지를 살려 고유의 지명(地名)과는 별도로 매김말(冠形語)을 사용한다. 千年의 古都 慶州라던가, 강릉을 문향(文鄕)강릉, 예향(禮鄕)강릉 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예이다. 文鄕江陵이란 말은 글 고장, 또는 글하는 고장, 학문을 숭상하는 고장이라는 말로 풀이할 수 있고, 禮鄕江陵 역시 道德과 禮節이 바르다는 의미와 孝行, 貞節이 뛰어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文鄕江陵
가. 自然
- 일찍이 동해안은 山紫秀麗하여 예부터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강릉의 寒松亭, 鏡浦臺는 新羅 花郞들의 대표적인 순례지(巡禮地)였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문인 이인로(1152~1220)는 한송정(寒松亭)을 찾아와 여기가 四仙들이 유람하던 곳, 지금도 남은 자취 기이하구나(云是四仙縱賞地 至今遺迹眞奇哉)라 했다.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 成俔, 金時習, 鄭澈, 楊士彦은 물론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우리나라 산수의 훌륭한 경치는 관동이 첫째이고 관동에서도 강릉이 제일이다-중략- 강릉에서도 가장 좋은 명승지는 경포대 한송정, 석조, 석지, 문수대라 하였다(雲錦樓記文-惟吾東韓山水之勝 關東爲最 於關東 惟江陵爲第一-中略- 江之最勝者 曰鏡浦臺 曰寒松亭 曰石竈曰石池 曰文殊臺也)
나. 文獻資料
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일찍이 강릉은 학문을 숭상하며 더박머리 아이 때부터 책을 끼고 스승을 따라 배우니 글 읽는 소리가 마을에 가득했다. 이를 게을리 하는 자는 여럿이 공동으로 내치는 벌을 가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 江陵大 都護府風俗條 崇學問 自髫齕挾冊從師 絃誦之聲 滿於里閭 慢者衆共黜罰之)고 하였다.
② 1614년 江陵府使로 왔던 정경세는 강릉은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고 풍속이 아름답기를 강원도에서 으뜸으로 본디부터 문헌의 고장이라 불러왔다(江陵鄕校誌-本府士子之盛 風俗之美 甲於一道 素稱文獻之邦)고 했다.
다.敎育機關
① 鄕校
廣汀里에 세워졌던 향교가 12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향교의 기능은 奉祀와 敎育 두 기능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교육기관으로서 강릉향교는 그 규범이 嚴正하고 敎育熱이 높았을 뿐 아니라 道義와 學風을 크게 떨쳐 大廡官이란 칭호를 받았으며 전국 234개 향교 가운데 그 가치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가문화재 보물214호로 지정되었다.
② 書院
서원은 조선중기 이후 士林에 의해 설립된 私設敎育機關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1543년에 건립된 白雲洞書院이며 강릉은 13년 뒤인 1556년 五峰書院이 건립되었다. 이후 율곡 이이를 配享한 松潭書院, 申石書院, 退谷書院이 있었다. 이는 강원도에서 가장 많은 서원과 가장 오래 된 서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밖에 서원은 아니지만 許筠의 호서장서각(湖墅藏書閣)이 있었는데 萬卷의 책을 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중국의 유명 전적을 다량 보유하고 누구나 쉽게 빌려볼 수 있게 하였던 바 최초의 사설도서관이라 할 수 있다.
라. 인물
전하는 말에 人傑은 地靈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듯이 강릉은 글 잘하는 文風의 영향을 받아 인격과 품성이 뛰어난 사람과 학문을 닦아 立身揚名한 사람이 많이 배출 되었다.
① 강릉의 12향현(鄕賢)
鄕賢이란 그 고장이 배출한 존경받는 인물로 先聖先師를 尊崇하고 道理를 실천하여 그 덕망이 후세에 龜鑑이 되는 儒賢을 의미한다.
강릉의 12향현은 崔致雲(1444~1521), 李成茂(1370~1436), 崔應賢(1428~1507), 崔洙(1443~1472), 金潤身(1444~1521), 朴公達(1470~1552), 朴遂良(1475~1546), 崔壽峸(1487~1521), 金說(1506~?) 金譚(1522~1605), 朴億秋(1523~1590), 崔雲遇(1532~1605)이다.
② 司馬試 및 文科의 及第者
최근 발행된 각 고장의 市史에 수록된 것으로 살펴보면 아래 표와 같다.
춘 천 | 원 주 | 강 릉 | 비고 | |
生員, 進士, 文科 及第者 |
司馬試: 217명 文 科: 56명 |
司馬試: 573명 文 科: 104명 |
司馬試: 429명 文 科: 137명 |
春川百年史, 原州市史, 江陵市史 참고 |
江原道誌 의 文武科 司馬條 |
84명 | 250명 | 260명 | 1940년 발간 |
2. 禮鄕江陵
가. 禮鄕의 意味
禮鄕의 의미는 단순하게 표현하기 어려우나 人倫의 道는 德에서 德은 禮에서 禮는 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禮鄕江陵이란 百行의 으뜸인 孝의 고장이라는 의미와 같다.
나. 文獻資料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이르기를 고을 풍속에 노인을 공경하는 것이 있는데 좋은 날을 가려 명승지에 노인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며 위로하였다(邑俗敬老每値良辰 請老者會于勝地以慰之)하였고 1486년 巡察使로 왔던 洪貴達도 鄕校를 重修할것을 임금께 주청하면서 오직 江陵은 峻嶺과 바다 사이 후미진 곳에 있기는 하나 이곳 사람들은 禮義를 익히고 詩書를 외우니 실로 우리 東方의 鄒魯입니다(惟江陵僻在海間 其人復禮義 誦詩書實吾東之鄒與魯)고 했다. 文風도 孔子가 태어난 魯나라와 孟子가 태어난 鄒나라와 같았으니 한마디로 東方禮義之鄕이라 아뢰었던 것이다.
다. 人物
人物의 考察은 江原道 전체를 살펴 이 고장 인물과 對比하여야 하나 資料가 드물고 언급한 숫자 역시 동일자료에서 발췌한 것이 아니므로 절대적이 아님을 알려둔다.
<孝烈 및 旌閭數>
구 분 | 孝子 | 孝婦·烈女 | 旌閭 | 三綱行實收錄 | 出典 |
춘 천 | 23 | 5 | 11 | 鄕校實記 | |
원 주 | 20 | 34 | 38 | 原州市史 | |
강 릉 | 181 | 83 | 78 | 4 | 增修臨瀛誌 |
삼 척 | 92 | 73 | 29 | 三陟誌 |
라. 孝烈閣 및 祠,堂,齋
孝는 德의 근본이며 모든 가르침은 孝에서 비롯한다고 강조한 공자의 사상이 들어 온 이후 전국각지에서 수많은 효자를 낳았다. 세종 13년 江原道司 高若海의 주청으로 효자와 烈女에게 旌門이 세워졌고 祠,堂,齋 또한 先祖에 대한 敬慕와 祭享을 올리고 아울러 가문의 위상을 알림과 동시에 門中내부의 結束을 다지기 위해 建立되었다. 그 數는 아래 표와 같으며 단연 전국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孝烈閣(碑) | 35 |
祠 | 12 |
堂 | 3 |
齋 | 55 |
* 위의 자료 대부분은 강릉시오죽헌 시립박물관의 전통문화교육 연수자료집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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